박유진이 일궈놓은 그림 정원의 이름 모를 식물들 사이로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은 식물로부터 발산되는 에너지와 식물이 흡수하는 에너지가 뒤엉켜 공간을 식물 향기로 가득 채운다. 브람스를 들으며 그렸다는 식물들은 뻣뻣하게 서있는 것이 아니라, 흔들거린다. 몸과 함께 마음도 흔들린다. 엉겅퀴 꽃들이 가로수를 이루고 있는 작품 [바람 속 정원](2012)에서는 사각형 풀밭을 향해 덩굴들이 구름처럼 내려오는 가운데, 식물과 공간을 휘휘 감아 도는 연한 녹색 띠가 상쾌하게 펄럭인다. 연한 녹색 띠가 엉겅퀴 꽃을 에워싸는 작품 [풍력 충전](2012)에서, 바람은 식물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충전 에너지로 작용한다. 날카로운 줄기와 크고 화려한 꽃망울을 가진 엉겅퀴는 바람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바람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는 듯하다. 박유진의 작품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여러 식물은 함께 리좀(Rhizome)을 이룬다.
▲ 박유진, 바람 속 정원 Garden in the winds, Acrylic on Canvas, 91.9x72.7cm, 2012
이 작품을 비롯하여, 한정된 공간임을 암시하는 불연속적인 사각 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작품 [붉은 꽃의 야상곡](2011)에서 사각형 형태 안에 또 다른 사각형이 창처럼 걸쳐 있다. 앞과 달리 뒤의 식물은 동양화처럼 표현되어 있다. 여러 개의 사각형이 등장하는 작품 [깊은 산 숲속에](2012)는 다른 시대, 다른 계절의 식물들이 공존한다. 화면 또는 장소의 한정은 조합을 통해 다양한 시공간을 병존시킨다. 테두리 안에 식물이 가득하기는 하지만, 숲이나 정글 같은 원초적인 자연은 아니다. 작가는 제주에 가서 천년의 나무가 자라는 숲에서 공포를 느낀 반면, 그곳 호텔의 정원에서는 아름다움을 본다. 어둡고 빽빽한 숲이 아닌, 사람의 손길로 다듬어진 반쯤은 인공적인 연출에 대한 취향이 있다. 광대한 자연 속에서 길을 잃기보다는, 자신의 계획이 투사된 자연에서 길을 만들려 한다. 미학적으로 본다면 숭고 보다는 아름다움에 기울어있다.
미술사는 숲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감이 사라지기 시작했을 때, 곧이어 인간이 마구 자연을 파괴하기 시작했을 비로소 풍경화라는 것이 등장하고 각광받았음을 알려준다. 한정지을 수 없는 야생과 달리, 정원은 일련의 계획과 조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본격적인 의미의 농경과도 다르다. 정원은 야생의 숲과 경작지의 노동 사이에 존재한다. 하인리히 롬바흐는 [정원의 철학]에서 경작지에서 정원의 반대 그림을 본다. 경작지는 노동을 의미하고 대지에 대한 폭력, 땀, 괴로움, 법규, 인공적 질서, 많은 조건들에게 복종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풍부한 수확물과 법과 공공성과 공동체를 가져다준다. 즉 문화를, 보다 높은 단계의 안정성과 자의식을 갖는 삶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지속적인 일방성이 수반된다. 자크 브로스는 역사적으로 양자를 대조한다. 그는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서 농업에 앞서 도처에서 원예, 즉 마당을 가꾸는 경작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 박유진, 깊은산 숲속에 Deep in the forest, Acrylic on Canvas, 91.9x72.7cm, 2012
브로스에 의하면 과수원과 채소밭, 관상 정원들이 밭보다 먼저 등장했다. 정원은 둘러싸인 것, 고립된 것을 의미한다. 가장 오래된 정원은 다듬어지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식물이 자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한되어 있고 폐쇄되어 있는 공간을 말한다. 자연과정에 개입함으로서 수확량은 증가하였다. 곡식 재배는 결국 어머니인 대지의 여신을 아들이 범함으로서 출현한 것이다. 농업은 초기에 매우 거칠고 폭력적인 행위로 인식되었다. 인간이 어머니인 자연을 가혹하게 다루어서 길들이는 행위는 원예와는 완전히 다르다. 원예는 양식을 주는 대지와의 내밀하고 평화스러운 협력관계이며 하나가 되는 교감 관계이기 때문이다. 원예에는 부계적 생산과 폭력보다는 모계적 살림과 평화가 발견된다. 초기 농경사회에서는 가족 부양은 남자의 몫으로, 남자들은 밭을 갈고 농사를 지음으로서 가족들을 부양한다. 밭을 가는 행위는 남성의 힘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공격성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사냥꾼의 경우 다른 육식 동물들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했을 뿐이므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었던 반면, 농경 생활자들은 자연은 질서를 거슬러서 자연을 강간하고 금기를 어기는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야생의 숲과 경작지의 차이처럼, 예술에도 극단적인 두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다. 박유진의 작품에서 원예나 정원의 공간은 원초적 자연인 숲이 농경의 기술과 노동력에 의해 완전히 경작지로 정복되기 전의 중간단계를 보여준다. 정원은 자연과 인공적 질서의 중간에 속한다. 길들여지지 않은 원초의 자연은 공포스럽고 생산력의 수탈 아래 놓인 자연은 지루하다. 그 자연에는 인공의 손길이 닿아있지만, 정원이나 공원, 과수원 같은 곳도 아니다. 전시부제는 다소 낯선 명칭인 ‘채수원’이다. 채수원이란 접붙이기의 위쪽 부분만 모아서 기르는 정원이다. 작품 [겨울나기](2012)처럼 이질적인 두 개가 접 붙은 나무들이 자라는 곳이 채수원이다. 작품 [접목] (2011)에서 아래둥치의 접면이 노출 된 나무는 다양한 그린으로 칠해진 여러 형태의 잎이 덥수룩하다. 작품 속 나무는 대지에 깊이 뿌리를 내린 대표적인 기념비적인 형상이 아니라, 풀처럼 유연하다. 대부분 우리들이 먹는 과채 나무는 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접붙이기의 산물이다.
▲ 박유진, 새벽녘 D의 정원 Around dawn D’s garden, 41x105cm
가령, 자연 그대로의 씨에서 자란 나무에서 딴 사과는 너무 시어서 먹을 수가 없다. 그 열매도 과일가게에 놓인 것들처럼 탐스럽게 크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로 접붙이기가 가능한 경우는 종류는 많지 않지만, 박유진의 채수원에는 정원처럼 자연과 인공의 합작품인 예술의 상상력으로 기이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정원은 또한 사랑과 관심어린 보살핌의 대상이자 과정이라는 점에서 인생과 비교될 수 있다. 정원을 가꾸는 자는 그곳에 자신을 투사하곤 한다.
정원은 정원사의 몸과 마음의 연장이다. 식물을 가꾸는 작가의 취미와 별개로,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에 이어 국제결혼을 한 그녀가 채수원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박유진의 채수원은 실제의 육종기술에는 불가능한 실험의 장이다. 시금치 잎부터 엉겅퀴까지 다양한 식물들이 등장하지만, 아래가 부실하고 위가 강조된 형태는 공통적이다. 채수원의 식물들은 보살핌의 대상이기에 관심을 끌기 위한 윗부분은 크고 화려하며, 접목과 이식을 위해 잘려지는 아랫부분은 있는 둥 마는 둥하다.
기이하고도 유혹적인 형태들은 자연발생이나 깊은 뿌리내림보다는 이식과 접목이라는 방식에서 기인한다. 식물들은 팝업처럼 얇은 바탕에서 일어나 있곤 하며, 대지는 두루마리 휴지처럼 한정된 폭과 길이와 얇기로 출렁인다. 작가는 깊이가 아닌 표면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를 발견한다. 화면도 색이나 형태로 꽉 채우지 않는다. 때가 되면 분갈이하는 것처럼 그림이라는 유기체에 숨통을 틔워주려 한다.
작품 [잡초 방지장치](2011)는 붉은 색 화초를 잡초로부터 보호하는 띠가 두루마리 종이처럼 리드미컬하게 공간을 점유한다. 두루마리는 팝 업 이미지와 함께 그림, 또는 자연의 시뮬라크르적 속성을 강조한다. 박유진의 채수원은 하나의 씨앗으로부터 출발하는 실체적이고 본질적인 사고를 벗어난다. 실체적이고 본질적인 사고를 추동하는 대표적 이미지는 하나의 씨앗이나 뿌리로부터 시작되는 거대한 계통수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서구 형이상학의 계보를 나무에서 발견한다.
▲ 박유진, 잡초방지 장치 Weed control equipment, Acrylic on Canvas, 181.8x72.7cm, 2011
그들은 나무가 왜 그토록 서양의 현실과 사유를 지배해 왔는가를 묻는다. 그것은 나무가 뿌리, 기초, 바닥, 토대를 암시했기 때문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서양은 숲과 벌채와 특권적 관계를 맺고 있다. 숲을 정복해서 생겨난 밭에는 종자식물을 심었다. 동양은 숲과 밭보다는 스텝과 정원과 관계된다. 농업이 서양이라면, 원예는 동양이다. 종자식물들로 하는 서양의 농사와 덩이줄기로 하는 동양의 원예의 대립, 그리고 씨뿌리기와 꽂아놓기의 대립이 있다. 뿌리의식은 초월적 사고를 낳는 서구적 질병이다. 저자들은 서구가 리좀이나 풀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서구적 관료주의의 특징은 농지와 토지대장으로부터의 기원, 뿌리와 밭, 나무와 나무의 경계 역할, 사유지에 기반 한 국가 세우기 등에 있다. 여기에서 하나의 점이나 뿌리로부터 시작하는 나무의 이미지가 강력하다. 반면 박유진의 작품 속 접붙여진 나무들은 풀 같은 속성이 강하다.
특히 화면 곳곳에 드리워진 덩굴손들은 마치 구름과도 같은 형태와 밀도의 가변성을 가지는 리좀의 이미지들이다. 심지어 한 나무를 이루는 잎사귀들도 형태와 색상이 제각각이다. 박유진의 작품 속 식물은 나무에도 리좀이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진화의 도식에서 나무나 혈통 같은 오래된 모델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신에 그들은 리좀을 내세운다. 진화의 도식은 덜 분화된 것에서 더 분화된 것으로 나아가는 나무 모양의 혈통 모델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질적인 것 안에서 즉각 작동하며, 이미 분화되어 있는 한에서 다른 선 위로 도약하는 리좀을 따라갈 것이다. 리좀은 하나의 반(反)계보이다. 생물학은 물론 신학, 인식론, 존재론 등을 지배한 형이상학적 계보학은 사회를 지배하는 통일적이고 계급적인 구조를 낳았다. 그와 비교해서 리좀은 총체나 전체를 이루는 유기적 구조가 아닌, 이질적 단편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모델을 가진다.
▲ 박유진, 붉은 꽃의 야상곡 Nocturne of red flowers, Acrylic on Canvas, 91x116.7cm, 2011
가령 박유진의 작품 [시금치의 자손](2011)에서 화면 오른쪽에 거대한 빨래처럼 널린 시금치는 다른 공간과 접 붙어져 있다. 옆의 공간에는 스케일이 다른 자잘한 덩굴들이 얽혀 있다. 불어오는 바람이 딱 잘려지는 불연속적인 면도 발견된다. 화면 속 박스나 큐브 같은 형태의 구성은 정원과 마주하고 있을 실내의 느낌도 준다. 자연은 한정된 영역에 있지만 조합의 방식은 다양하다. 가장 대표적인 방식은 자신이 좋아하는 식물들을 한 공간에 모아 놓는 것이다. 한 쌍을 이루는 작품 [가지접목](2012)은 한 화분 안에 여러 식물이 자라고 있다. 시간 또한 일관적이지 않다. 낮과 밤, 그리고 지각과 기억이 공존하는 일은 흔하다.
구성과 형태의 유희에 스케일과 색채의 변주가 가미되면서 작품 속 그다지 많지 않는 식물 종들은 다양하게 변모한다. 그림이 그려지는 방식처럼 처음의 계획을 벗어나 붙였다 뺐다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엉겅퀴, 맨드라미, 시금치 같이 박유진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식물들은 고요하고 약하고 정지된 식물성 뿐 아니라, 요란하고 강하고 역동적인 동물성의 느낌도 있다. 구별되는 두 가지 성향의 병존은 작가 자신에게도 찾아진다.
이번 전시에서 관객은 정원이나 리좀이라는 소재나 주제를 읽게 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강렬한 색채 효과를 보게 된다. 박유진의 작품에서 다소간 동시대와 공명하는 소재나 주제는 색채를 운용하는 기술에 의해 독특한 지점을 확보한다. 여러 작품에서 뜬금없이 나타나는 거대한 시금치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가장 잘 활용하는 녹색 계열의 색상이 다채롭게 펼쳐지는 장이다. 다양하게 굽이치는 잎의 굴곡 면에서 풍겨 나오는 색채 에너지는 뽀빠이의 원천처럼 활력 가득하다. 작품 [채수원의 에너지](2012)는 거대한 시금치와 그 옆에 붉은색 꽃들이 대조를 이루면서 화면에 활기를 준다. 녹색 풀숲이라는 배경과 바닥에 물마루 같이 넘실대는 하늘색이 축축한 식물 군락의 느낌을 강조하는 작품 [새벽녘 D의 정원](2011)에서, 위에서 내려오는 붉은 색 뭉글거리는 덩굴은 날카로운 녹색 잎과 대조를 이룬다. 형태와 색채의 대조는 그 낙차를 통해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작가는 전시를 할 때마다 한 작가를 연구한다고 하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색채의 마술사 보나르이다. 보나르의 색채는 인상주의의 묘사와 야수주의의 표현 사이에 미묘하게 걸쳐있다. 마술의 숲 같은 이미지에서 루소를, 데페이즈망 형식에서 마그리트를 떠올리게 한다면, 이번 전시에서 연구한 보나르의 작품은 색채의 터치로 이루어진 공간이 여러 겹 있는 동시에 평면적인 회화의 효과를 참조했다. 정원이라는 소재와 더불어 녹색 계열로만 20여개의 컬러 차트가 동원되었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시금치 한 잎부터, 작품 [가지치기](2011)처럼 숱 많은 나무 잎 하나하나를 각각 다르게 칠한 경우까지, 다양한 녹색 계열이 펼쳐진다. 복합적인 소재와 형식이니 만큼, 색의 온도를 맞추는 일에 치중했다. 화가가 강약의 변화를 주며 화면에 자유롭게 바른 색의 얼룩들은 정원이라는 한정된 자연을 수많은 뉘앙스로 물들인다. - 이선영(미술평론가)
이번 전시는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갤러리 거락(www.gallerycola.com)에서 4월 6일부터 4월 26일까지 열린다.
전시작가 : 박유진(Park Uzine)
전시일정 : 2012. 04. 06 ~ 2012. 04. 26
초대일시 : 2012. 04. 06 PM 5:00
관람시간 : Open 10:00 ~ Close 19:00(일, 공휴일 휴관)
전시장소 : 갤러리 거락(Gallery CoLA)
전시문의 :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30-4 / 070-4235-6483
■ 작가약력
2004 홍익대학교 회화과 대학원 졸업
2002 홍익대학교 회화과 졸업
2007, 2011, 2012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시간강사
2003-2011 계원예술 고등학교 실기 강사
2006, 2009 예술의 전당 어린이 미술교실 강사
2007~now 미국 Golden Artist color/ 지원작가 Working Artist
개인전
2012 채수원 採穗園 Scion Garden(갤러리 거락)
2010 Restoring Vitality(인사동 노암갤러리)
2007 “I will protect You.”(삼성동 송은갤러리 )
2006 아름다운 결함(인사동 NV갤러리)
2005 Role playing(인사동 노암갤러리)
그룹전
2011 뉴스타트(청작 화랑)
2011 홍익여성화가협회(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2010 쨈 아트마켓- 장흥 아트 파크
2010 V갤러리-현대미술 33인전(예술의 전당)
2009 phobism(경기대학교 호연 갤러리)
2009 Two See(수원 대안공간 눈)
2005 Loaded Gun (청담동 더 스페이스 갤러리)
2004 예술가는 마법사 전(갤러리 아트사이드)
2003 유쾌한 공작소(서울시립미술관)
2003 화기애애 전(종로갤러리)
2003 벽강예술관 개관기념 초대전 (벽강 예술관)
2002 날으는 돼지 문화열차(지하철 5호선)
2002 잠실 재개발 프로젝트(잠실 송전 초등학교, 안양 스톤 앤 워터 갤러리)
2002 기억 그리고 흔적 (방배동 무지개 아파트)
2002 보물찾기 전 (홍대주변)
2001 크리스마스 소품전(홍대주변)
수상
2007 문예진흥기금 신진예술가 지원(성장 프로그램) 선정
2007 송은 문화재단 무료대관 작가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