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욱작가 슬로비키아 초대 개인전 귀국 보고전이 7월 14일부터 시작하여 7월 27일까지 수원시 행궁로에 위치한 아름다운행궁길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회에서 강작가는 Thinguniverse라는 주제를 가지고 드로윙 퍼포먼스를 한 설치예술작품을 선 보이고 있다. 하얀색 벽면을 작가의 시선으로 그려진 그의 작품에서는 전시장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지닌 사물에 대해 선으로 드로윙하며, 특정시간과 장소 안에서 존재함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 다시 하얀색 페이트로 다시 지우고 새로운 드로윙을 함으로써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기도 한다. 마치 분필로 칠판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이러한 행위들은 또 하나의 작가가 의도한 예술적 퍼포먼스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회는 7월 27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강제욱 작가의 작품 Thinguniverse는 드로잉 퍼포먼스다. 여기에서 드로잉은 하얀 벽면에 까만 펜으로 드로잉 하는 것과 다시 하얀 페인트로 painting out 해버림을 포함하는 의미다. 하얀 벽면에 드로잉 하는 것은 생성을 의미하고 그려진 것은 특정 시간과 장소 안에서 존재함을 의미하며 일정 시간이 지난 후 하얀 페인트로 지워버리는 것은 소멸을 의미한다. 결국 이 작업은 드로잉 퍼포먼스이자 페인팅-아웃 퍼포먼스이기도 하다. 작가가 드로잉 하는 것은 전시실이자 작업실의 공간을 방문하는 사람이 지닌 것들things이다. 중절모, 지팡이, 안경, 카메라, 코트, 신발 등 작가의 눈이 순간 스치며 스캔하면서 잡히는 모든 것들의 외형을 드로잉 하는데, 오로지 선으로만 한다. 세상 모든 물건은 종국에 가서는 동일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선으로 드로잉 하는 외형으로 재현한 것이다.
작가는 우주의 모든 존재를 영원불멸하는 본질을 갖지 아니하는 것으로 본다. 모두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치는 존재다. 그가 드로잉 하는 오브제는 각양각색이고, 현재 처한 위치와 띤 정체는 모두 다르고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주적 차원에서 볼 때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모두 연계되어 있다. 누군가가 가져온 스마트폰 하나에도 생과 사가 있다. 그 스마트폰이 만들어져서 어떤 사람을 만나 유용하게 잘 쓰이다가 어느 날 사라지는 것이 세상 이치이고 우주의 운용 원리다. 스마트폰을 구성하는 물질은 한국 것도 있지만 중국에서도 오고, 미국에서도 오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곳에서도 온다. 플라스틱은 엄청난 시간 속에 존재한 공룡의 뼈와 살이기도 하다. 스마트폰은 이 자리 이 순간 작은 나와 전 세계, 전 우주 그리고 모든 시간을 연결시키는 매개가 된다. 스마트폰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연결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연계되어 있는 세계의 이치를 스마트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작가는 그것을 말하고자 한다.
하얀 벽면에 그려진 것들은 생성되면서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러면서 위아래와 옆에 그려지는 또 다른 것들과 어떤 관계를 새로 맺는다. 모든 사물은 만들어지고, 만나고, 쓰이는 과정 속에서 모두 계를 맺는다. 따라서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즉 화가가 선택하는 특정 사물은 화가가 어떤 이념을 가지고 선택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가지고 오는 것을 오로지 스캔하여 보이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관계를 맺어주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재현representation 하는 것일 뿐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자체가 관계 맺음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이라도 과정을 벗어나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점이나 순간이 아닌 선이나 면 그리고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물이나 무생물 모두 마찬가지다.
인드라망(網) Indra's net이라 불리는 불교의 연기론 principle of causality과 무척 닮았다. 작가가 인드라망 개념을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작업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문화적 토양 안에서 자란 작가는 부지불식간에 불교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 또한 인연의 결과다. 누군가가 이른 아침 거미줄에 걸려 있는 영롱한 아침 이슬에 보이는 우주의 이치다. 거미줄에 걸려 있는 이슬 방울 하나 안에 다른 이슬 방울이 반영되고, 그 다른 이슬 방울 안에는 또 다른 이슬 방울이 반영된다. 모든 사물이 그렇고, 온 우주가 그렇다. 그 안에서 독립적인 것은 없고, 영원한 것도 없으니 모든 것이 다 공허하다. 만남은 곧 헤어짐이요, 헤어짐은 곧 만남이다. 삶은 죽음이요, 죽음은 곧 삶이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This is, because that is. This is not, because that is not. This ceases to be, because that ceases to be.
강제욱 작가의 Thingunivers는 한 번의 작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을 바꾸어가면서 한 작업은 또 다른 작업으로 연결된다. 동일한 것도 없고 다른 것도 없다. 작업이 남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한 날 한 시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다 사라진다. 그 우주적 질서 안에서 영원히 같은 것도 있을 수 없고, 영원히 다른 것도 있을 수 없다. 장소와 시간은 축적되면서 과정을 이루고 그 안에서 작은 것들은 거대한 하나를 생성해 나간다. 또 다른 소멸을 위해. 작가가 천장, 바닥, 벽의 세 면을 모두 작업 공간으로 삼는 것은 그 공간을 연기(緣起)에 바탕을 둔 우주로 보기 때문이다. 사물은 바닥 위에 존재하고, 그것은 작가에 의해 벽에 재현된다. 그리고 존재와 재현은 실을 이용하여 연계된다. 실은 모든 시공간을 이어주는 인과 연의 끈이다. 슬로바키아의 쿤스트할레 전시장에 설치되는 실은 한국의 수원에서 온 인연을 이어주는 끈이고, 그것은 다시 한국의 어딘가에서 열릴 귀국 전시로 이어주는 끈이 된다. 실은 우주를 잇는 거대한 매트릭스가 되고, 그 안에서 강제욱은 생성과 소멸이 하나임을 보여주는 철학하는 아티스트가 된다.
글, 이광수 (인도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