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展 - 多情多感 다정다감

기사입력 2012.03.30 12:12 조회수 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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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남, 가족여행, Acrylic on Canvas


자제라르 슈리게라(미술평론가, 프랑스)

눈에 보이는 모습의 핵심에 접근하는 것, 그것은 이론적 접근이 난무하고 테크놀로지가 궁극에 이를 정도로 진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체에 대한 지속적 접근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가시적 세계를 파악하는 역할을 떠맡은 언어를 계속 정당화하는 접근이기도 하다. 직접적 혹은 암시적 인용에 근간을 둔, 달리 말한다면, 일반적으로 찬양되는 미술사의 뒤흔들기에 근간을 둔, 포스트 모던적 인식 속에 파악된 모든 것 즉 회화적 요소, 실용적 대상 혹은 더 나아가 일상적 사진을 화면에 도입하는데 관심을 보이는 조영남의 작품은 결코 그러한 창조의 원천들을 멀리하지 않는다.

그가 사는 시대의 이 거대한 미학적 등장을 수용하고, 그의 고유한 문화적 상징들에 의해 끊임없이 영양분을 공급받는 그는 순수한 의미에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묵화의 형식적 경향, 산수화의 전통 혹은 동양적 특징을 지닌 상징들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실체와 그것의 개념사이에 불명료한 경계들을 명료하게 하고 그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창조하고자 하였다. 자전적인 흔적들로 입혀진 분출되는 화풍은 그렇게 형성되었다.

그것은 설명을 하지는 않지만, 그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독백을 표출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개인적 구미에 맞는 싯귀를 뿌리는 일종의 발자취 놀이와 같다. 회화적 질감, 사진 그리고 오브제들은 그럴듯한 공식을 거부하고 있다. 그의 신텍스는 여려 가지 뜻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일종의 개인적 신화를 드러내고 있다. 유희적 세계와 예술적 세계는 단편적인 대화의 연속에 의해 꼴라쥬의 뒤범벅과 원래의 환경에서 이탈된 오브제들을 연결하는 풍부한 이미지로 형성되어 익살과 유머로 가득차서 순회하게 된다.

▲ 조영남, 극동에서 온 꽃, 100x52cm, Acrylic & Collage on Canvas


유럽적 추상 그 중에서도 덧칠로 중첩된 화면으로 특징지어지는 어떤 경향으로 1970년대 처음 등장한 그는 어슴프레하고 단단한 구조감을 느끼게 하는 도시적 모습 혹은 소박하고 외딴 오래된 촌락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이 후 그는 그의 화면 속에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 계산된 징서의 공간 속에 펼쳐지는 단편적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혼합매체를 사용하였고, 특히 한국의 카드놀이를 도입하였다. 연속적으로 던져지는 진짜같이 채색된 이들 작은 형태의 성좌들은 그 한복판에 교차적으로 배열된 초상화 사진 혹은 수많은 얼굴이 중첩되어져서 나타나는데, 이들은 수수께끼라기 보다는 알파벳 기호와 같은 암호들이다.

그는 우화적 색조로 이들의 결합과계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동일한 기조로 일정한 범위에서 그리고 그러한 범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태극기를 끌어들인다. 철저한 해석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숫자, 단어, 구면체 혹은 자신의 자화상이 이들 작업과는 다른 울림으로 그 위에 덧붙여져서, 그러한 결합이 지니는 충격과 일관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 조영남, 극동에서 온 꽃, 63x93cm, Acrylic on Canvas


끊임없이 작품의 특색을 다양하게 하면서, 조영남은 이제 이러한 기조 위에서 때로는 후기 입체파적 영감으로, 때로는 기하학적으로 꼴라쥬를 끌어 들이고 있다. 이들은 늘 환상으로 충만하게 된다. 이들 꼴라쥬들은 대비되는 뉘앙스로 각인되는 분명한 기반 위에 놓여져서, 천조각, 속기록 같은 기호, 점묘, 판지의 일부, 줄무늬, 그리고 짤막한 문설주에서 관찰된 우연한 구조물들과 같은 것들이 세분된 접합으로 집대성된 일종의 3차원적으로 구획정리한 토지대장으로 변모된다.

그렇게 해서 일상적 오브제 혹은 버려진 오브제들이 접목된다. 예를 들면 버들가지로 만든 입체, 광주리, 통조림통, 손잡이, 작은 궤, 그리고 섬유, 궁근 싹들로 구성된 소관목들이 그것이다. 이 순간 이들은 더 이상 오래된 구멍난 문 혹은 틀, 받침대 위에 놓인 요강, 들쭉날쭉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금속조각 혹은 재미있는 장기놀이가 아니게 된다.

▲ 조영남, 황금단추, Bronze


슈비터스의 연장선 속에서 그리고 입체파 화가들의 형식적 논리와는 반대로, 부가적 가치로 회화를 풍요롭게 하는데 근간을 둔 다다의 꼴라쥬에 대한 실험의 연장선 속에서, 조영남은 강건한 양식적 자율성, 그리고 동일한 종합의 개념 속에서, 보강된 회화적 오브제와 실체 속에서 꼴라쥬의 실험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는 더 이상 레디메이드 개념의 궤적 속에 오브제를 다루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에는 시각이 위생학이나, 산업적 본질에 관한 양적 견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오브제로부터 직접적으로, 그의 기하학적 성향의 구성들은 경직되지 않게 어떤 감각적 경향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의 팝아트적 요소에 관해서 말하자면, 사람들이 그를 종종 비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는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의 어휘는 "한국적 생활방식"의 복사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남의 예술이 그의 시대 속에 정당하게 닻을 내리게 되고, 그의 주된 경향들로부터 분리되어 다루어 질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지각하는 것의 유일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 것이다. 그의 상징으로부터의 힘은 그러므로 지시체를 초월하여 우리들의 상상적 세계 속에 재탄생하게 된다.

각각의 회화는 어떤 특정한 장소, 어떤 특별한 추억을, 즉 감동받은 느낌들을 간직하는 어떤 기억의 시초가 된다. 분명하지만, 은밀한 부분은 감싸는, 때로는 감정적이지만 때로는 절제적인, 선동적이지 않은 우상파괴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조영남의 작품은 오직 그만이 열쇠를 쥐고 있는 우화작가적 감각을 펼쳐나가고 있다.

이번 전시는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장은선갤러리(www.galleryjang.com)에서 4월 4일부터 4월 21일까지 열린다.

문의 :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 66-11 / 02-730-3533



[오창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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